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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속독? 기억력? 암기력?…주산 훈련이 최고죠!”
주산 부활 이끄는 ‘주산왕’ 이정희 11단
고1때 ‘국내 첫 주산 11단’ 유명세…TV서 계산기와 대결도

결핵으로 3년간 고생…“죽기전 주산 재능 전파” 결심

디지털에 의존 기억력 도외시…“IQ 140? 훈련 덕이죠”

주산학원 설립…“사교육 넘어 공교육서 주산 부활됐으면”




“선생님 시험 보러 왔어요.”

태권도학원을 막 마치고 온 듯 도복을 입은 한 꼬마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원장실 문을 두드렸다. A4 크기의 시험지에는 2~4자리 숫자가 어지럽게 적혀 있다. ‘찰칵’, 타이머 시작과 함께 아이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쉼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문제를 푸는 아이가 기특해 시험지를 슬쩍 엿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이가 써가는 답은 3자리가 넘는 숫자의 덧셈, 곱셈들. “이거 암산으로 풀고 있는 건가요?” 행여나 방해될까 조용히 원장선생님께 물어보자 돌아오는 답이 더 걸작이다. “그냥 크게 말하세요. 그 정도로 방해받으면 암산이 아닙니다.”

잊혀진 주산이 다시 부활하고 있다. 주산으로 터득하는 암산이 영재교육으로 주목받으면서 거리 곳곳에 주산학원이 빠르게 늘고 있는 추세다. 주산 부활의 중심에는 한국 최초 주산 11단 이정희(48) 씨가 있다. ‘주산 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선 그는 유명 예능프로그램에도 수차례 출연하며 말보다 신기(神技)에 가까운 실력으로 보는 이를 놀라게 했다.

원장이자 교사로 직접 주산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그는 “주산의 혜택을 더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주산이 부활하는, 부활해야 하는 이유를 ‘주산왕’ 이 씨에게 물어봤다. 인터뷰를 시작하려는 찰나, 문제를 다 푼 아이가 그제야 고개를 든다. “잠시만요”, 볼펜을 들고 이 씨가 채점을 하기 시작했다. 100점이다. 두자릿수 곱셈 암산조차 난해한 기자로선 마치 마법을 보는 듯하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주산 실력으로 주목받던 이 씨가 전국적으로 알려진 시기는 1979년. 국민 누구나 주판을 사용했던 시절이었고, 그 해 이 씨는 국내 최초 주산 11단에 등극했다. 당시 고등학교 1학년에 불과했기에 세간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전자계산기와의 시합도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는 “당시 묘기대행진이란 유명 TV프로그램에 나가 계산기를 가장 빨리 다루는 달인과 계산 시합을 벌여 이기기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누구나 주산학원을 다녔고, 상점마다 주인이 주판을 갖고 있던 시절이었다.

주산이 사라진 결정적인 계기는 전자계산기의 보급이었다. 80년대를 지나 전자계산기가 빠르게 퍼졌고, 90년대 후반 국가기술자격 시험에서 주산이 제외되면서 주판은 점차 서랍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씨는 “1981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금융결제원에 취직하면서 나 역시 주판과 떨어져 살게 됐다”고 회상했다.

‘신의 직장’ 금융결제원에서 ‘주산 전도사’로 탈바꿈하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집안의 권유로 전업주부를 하고자 회사를 떠났고, 운명의 장난인지 직장을 그만두자마자 결핵으로 3년을 누워 있어야 했다. 

이정희 씨는 한국 최초 주산 11단의 ‘주산왕’이다. 평생을함께해온 ‘보물 1호’ 주판을 손에 들고 아이들에게 주산교육을 전파하며 ‘주산 전도사’로 나서고 있다.  
                                                                                          [그래픽=이은경/ pony713@heraldcorp.com

그는 “항상 죽기 전에 주산의 재능을 사회에 전파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직장을 그만두고 병치레까지 하고 나니까 그 마음이 더 확고해졌다”고 밝혔다.

‘무한도전’ ‘스타킹’ ‘그것이 알고싶다’ 등 유명 TV프로그램에 출연하고 2007년 직접 주산학원을 설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주산 전도사’로 여생을 보내고자 결심하면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주산 알리기에 앞장섰다.

이 씨가 전하는 주산의 장점은 무궁무진하다. 주산의 생명은 정확성과 속도. 연산력은 기본, 속독, 기억력, 암기력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이 씨의 휴대폰에는 저장된 전화번호가 없다. 모두 머릿속에 들어 있어 저장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어렴풋한 옛 기억으로 지인끼리 설왕설래할 때도 이 씨의 말 한 마디면 모두 수긍한다고 한다. 소위 ‘기억의 종결자’인 셈이다.

순간 140이 넘는 이 씨의 아이큐가 생각났다. 하지만 이 씨는 기억력 역시 훈련으로 키워진다고 말했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많은 이가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지만, 디지털에 의존한 지금은 모두가 전화번호를 비롯해 무엇이든 기억하는 훈련을 하지 않아요. 기억력은 아이큐보다 훈련이 중요합니다.”

부모와 지인 몇몇 전화번호만 가까스로 외우고 있는 기자 역시 휴대폰을 갖기 전엔 수십개의 번호를 기억하곤 했다. 최근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디지털 치매’도 같은 맥락이다.

이 씨의 바람이자 목표는 정식 초등교육에 주산이 부활하는 것. 어린 시절 주산으로 습득한 두뇌교육이 본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그 마음은 더 간절하다.

그는 “어린 시절만큼 주산이 효과적인 시기가 없다. 주산을 전파하고 싶어 학원을 시작했지만 이제 사교육을 넘어 공교육이 앞장서서 주산 전파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 씨는 인터뷰를 마치며 ‘보물 1호’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열쇠로 조심스레 보관함을 열자 나온 건 다름 아닌 주판 하나. 1974년 일본 지인으로부터 선물받은 주판으로 평생을 이 씨와 함께했다고 한다. 40여년 전 가격이 10만엔(135만원)에 이르니 그야말로 ‘명품 주판’이다.

그는 “이렇게 주산이 중요하게 인정받는 시기가 있었다. 주산이 다시 옛날의 화려한 명성을 되찾았으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상수 기자 @sangskim>
dlcw@heraldcorp.com
사진=박현구 기자/ phko@heraldcorp.com




일본산 주판 쓰는 이유?

국내선 단순 도구로 인식

주산 교육 열풍 식자

생산업체도 사라져


이정희 씨는 학원 수강생이 사용하는 주판을 일본에서 사오고 있다. 주산교육이 사라지면서 국내 주판 생산업체가 대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주산교육을 이어가고 있다는 게 이 씨의 설명이다. 주산을 ‘하나의 도구’로 치부한 한국과 주산을 ‘하나의 교육’으로 판단한 일본, 주판 수입의 뒷배경에는 이러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70~80년대만 해도 주산이 국제대회로 열리던 시기였고, 일본은 꼴찌를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는 게 이 씨의 기억이다.

그는 “대회에 참가하면 일본에서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비결을 묻는 등 한국의 실력을 따라잡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회상했다.

일본 역시 전자계산기, 컴퓨터 보급 등을 거쳐 주산 열풍이 주춤하긴 했지만 여전히 사교육 시장에선 꾸준히 인기를 끌고 있다.

한국주산협회에서 활동 중인 고경옥 숙명여대 교수는 “일본의 경우 공무원 채용 과정에서 주산자격증에 가점이 부여되기도 한다”며 “한국에서 한순간 주산교육이 사라진 것과 달리 일본은 계속 명맥을 이어가며 실력을 쌓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 주판 생산업체가 사라진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최근 주산교육이 부활할 조짐을 보이면서 국내 주판 생산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지만, 전문업체 생산이 아닌 단순 조립생산에 그치고 있다.

이 씨는 “전문적으로 주판을 생산하는 업체가 없고 공장 라인 일부에 주판을 조립 생산하다보니 질적으로 떨어진다. 일본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라고 전했다.

고 교수는 “장기적으로 주산 실력을 국가공인으로 인증하는 게 필요하지만 우선 교과서 등을 통해 주산을 전 국민에 알리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주산을 직접 배우며 효과를 체감했던 부모 세대도 얼마 남지 않았다. 주산교육을 제대로 부활할 수 있는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김상수 기자 @sangskim>
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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