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미 달러화와 유로화, 일본 엔화를 세계 3대 준비통화(Reserve Currency)라 부른다. 각국은 이들 통화를 중심으로 외환보유액을 쌓는다. 유동성이 풍부하고 안전하기 때문이다.
전대미문의 미국 국가 신용등급 강등과 수그러들 줄 모르는 유럽 재정위기로 달러화와 유로화는 체면을 구길 대로 구긴 상태다. 특히 달러화는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의 일대 혼란으로 일시적인 강세를 보였지만, 이번 사태가 수습 국면에 접어들면 약세를 면치 못할 게 불 보듯 뻔하다.
3대 준비통화 중 유독 시장으로부터 여전히 신뢰를 받고 있는 게 엔화다. 일본경제가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20여년 동안 저성장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위상이 추락했지만 엔화가치는 꾸준히 상승해왔다.
올 들어서는 동일본 대지진 복구비용으로 재정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면서 국가 신용등급마저 하향조정됐지만 엔/달러 환율은 최저치를 경신하며 급상승하고 있다. 지난 11일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화가치는 장중 한때 달러당 76.29엔을 기록, 사상 최저치인 76.25엔에 바짝 다가섰다. 특히 엔화는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될 때 강세를 띄는 경향을 보인다.
통화가치에 대한 시장의 신뢰는 그 나라의 ‘부채 감내력(Debt Tolerance)’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한국은행은 지난 11일 ‘엔화가 안전자산으로 평가되는 배경’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세계 1위의 순대외채권 규모 ▷일본 국내 경제주체의 국내자산 선호(home bias)에 따른 대외충격에 강한 국가 채무구조 ▷일본경제의 낮은 불확실성 등 세가지를 그 이유로 꼽았다.
실제로 일본의 순대외채권 규모(2010년말 기준)는 3조1000억달러로 세계 최대다. 일본의 개인 및 기관투자자들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국내 투자 편향이 강해 대외충격이 발생해도 정부와 기업이 자금조달 애로를 크게 겪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엔화는 쭉 글로벌 금융시장의 신뢰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한은 국제경제실 이홍직 과장은 “안전자산으로서 엔화의 위상은 당분간 유지될 것”이라며 “다만 안정 지향적인 투자ㆍ소비 행태가 이어지면서 저성장이 지속될 경우 중장기적으로 일본경제 대한 신뢰가 떨어져 엔화의 위상 또한 약화될 가능성이 상존한다”고 평가했다.
결국 ‘엔화=안전자산’이란 등식을 가능케 한 일본경제의 강점들이 나중에는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신창훈 기자 @1chun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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