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클롭스
감은 눈
흰 꽃병과 꽃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일부)', 1914, 패널에 유채 등, 65.8x52.7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폴리페모스는 키클롭스(하나의 눈을 가진 거신) 무리 중 가장 세고 사나웠다.
그는 외모부터 무서웠다. 이마 한가운데 박힌 큰 눈은 그 자체로 기괴했다. 털로 뒤덮인 근육질 몸도 공포스러웠다. 하는 짓 또한 야만적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건 버둥거리는 동물을 산 채로 삼키는 것이었다. 제일 잘하는 건 집채만한 바위를 뽑아 던지는 일이었다. 그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었다. 뒷배가 있기에 더 마음껏 날뛸 수 있었다. 못 생기고 제멋대로였던 폴리페모스에게는 연인도, 친구도 없었다. 그는 종종 해변 바위에 홀로 앉아 피리를 불곤 했다. 이날도 그런 날이었다. 멍하게 앉아있던 폴리페모스가 눈을 비볐다. 파도 끄트머리의 흰 물결에서 한 여인이 보였다. 긴 머리의 그녀는 꽃처럼 춤을 췄다. 바다의 요정, 갈라테이아였다. 폴리페모스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처음 겪는 사랑의 느낌이었다.
오딜롱 르동, '오필리아' |
하지만 폴리페모스는 그 감정에 서툴렀다. 폴리페모스는 갈라테이아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다. 갈라테이아는 당연히 질색했다. 육중한 거인이 밤낮없이 뒤를 밟으니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이유는 또 있었다. 그녀에게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다. 부드러운 턱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 아키스였다. "제발 그만 하세요!" 잰걸음을 이어가던 갈라테이아가 더는 견디지 못해 소리쳤다. "갈라. 나, 나에게도 기회를 줄 수 없을까." 폴리페모스가 더듬더듬 말했다. 갈라테이아는 그 말에 가만히 섰다. 고개를 떨군 채 입을 떼길 주저했다. "주, 줄 수 없어?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라서?" "….솔직히 말하면, 아키스를 사랑하는 마음과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 중 무엇이 더 큰지 잘 모르겠어요." 갈라테이아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날 밤, 폴리페모스는 그 큰 눈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디선가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폴리페모스는 등을 편 채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해변에서 갈라테이아와 아키스가 꼭 붙어있었다. 폴리페모스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말더듬는 괴물 이야기나 하며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폴리페모스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그는 가장 큰 바위를 쑥 뽑았다. 그대로 던져버렸다. 곧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이어졌다. 아키스가 깔려 죽은 것이었다. 간신히 피한 갈라테이아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떨고 있었다. 폴리페모스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 갈라테이아는 폴리페모스를 더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면 나도 그냥 죽이라는 태도였다. 폴리페모스는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게 더 괴로웠다. 갈라테이아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그렇기에 멀리 떨어지지 못했다. 자기가 벌인 짓이 있으니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의 그림 '키클롭스' 속 폴리페모스는 잠든 갈라테이아를 훔쳐보고 있다.
화폭에 그려진 폴리페모스는 기괴하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에서는 사랑과 원망, 외로움과 상실감이 뚝뚝 흐르는 듯하다. 들꽃이 넘실대는 화사한 배경 속 고개 내민 그는 무섭기보다는 여리고 처량해 보이기도 한다. 르동은 몸과 마음 모두 못난 괴물, 한편으론 불쌍하기까지 한 이 괴물을 왜 그렸을까.
오딜롱 르동, '고자질하는 심장' |
르동의 '키클롭스'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삶을 시작부터 살펴봐야 한다. 르동의 그림이 그렇듯, 그의 이야기도 평범하지만은 않다.
르동은 1840년 프랑스 남부 보르도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생후 이틀 만에 부모와 헤어졌다. 그가 간 곳은 친척이 있는 메독 지방의 페이를르바드였다. 르동이 부모와 왜 곧장 떨어졌는지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그가 뇌전증 증상을 보였고, 이에 치유 내지 은폐 목적으로 보내졌다는 게 유력하다. 좋게 보면 요양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내쳐진 것이었다. 잡목과 습지가 깔린 이곳에서 르동은 부모의 정을 그리워했다. 홀로 떨어진 르동은 점차 침울하고 병약한 아이로 컸다. 르동은 잿빛 하늘 밑에서 걷고, 모래바람 부는 언덕에 누워 사색에 젖었다. 가끔은 커튼 뒤에 숨어 망상 수준의 상상에 빠져 헤엄쳤다. "그곳에선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온갖 것들로 상상력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훗날 르동의 회상이었다.
오딜롱 르동, '달걀' |
르동을 고독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건 그림이었다. 르동은 어릴 적부터 목탄을 갖고 놀았다. 검은색으로만 표현할 수 있는 선과 명암에서 묘한 쾌감을 느꼈다. 양껏 칠하다보면 고립감, 외로움 등 아픈 감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르동은 1851년에야 보르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열한 살일 때였다. 르동은 바로 학교 교육을 받았다. 그의 1순위 관심사는 당연히 그림이었다. 그 다음은 문학과 음악 정도였다. 르동의 아버지는 '돈이 되기 힘든' 학문만 좋아하는 아들이 실망스러웠다. 왜 이렇게 검은색 그림에 매달리는 건지, 왜 이토록 쓸쓸한 이야기와 어두운 음악에 집착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왕 한다면 건축학을 배우길 바랐다. 건축 시험까지 치도록 밀어붙였지만, 시무룩한 아들이 들고 온 건 불합격 통지서뿐이었다. 그렇다면 그나마 돈이 되는 화려한 고전 미술을 익히길 원했다. 그래서 명문 에콜 데 보자르(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 교수 경력의 장 레옹 제롬(Jean Leon Gerome·1824~1904)을 붙여줬다. 하지만 르동은 제롬의 작업실에서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잠시 파리로 갔던 르동은 또 보르도로 돌아왔다. 집안의 실망감만 또 등에 업은 채.
오딜롱 르동, 'Swamp Flower' |
1864년쯤, 의기소침하게 있던 르동은 보르도에서 로돌프 브레스댕(Rodolphe Bresdin·1825~1885)과 만났다.
그보다 열다섯 살 연상의 브레스댕은 검은색을 통해 꿈과 상상을 표현하는 판화가였다. 르동은 브레스댕 그림 특유의 기묘한 주제, 어두운 화풍에 푹 빠졌다. 돌고 돌아 드디어 딱 맞는 스승을 만난 것이었다. 르동은 비슷한 시기에 사상가 겸 식물학자 아르망 클라보와도 우정을 다졌다. 그에게서 우울한 시인 샤를 보들레르, 공포 소설의 대가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접했다. 장엄한 역사보다 이들의 축축한 이야기가 르동에게 더 많은 영감을 줬다. 르동은 클라보 소개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도 읽을 수 있었다. 생물의 불완전한 형태, 가령 돌연변이 같은 존재에도 관심을 두게 된 순간이었다. 르동은 훗날 '누아르(noir)'라고 불리게 될, 그만의 검은 그림을 그릴 준비를 마쳤다.
오딜롱 르동, '물의 수호신' |
오딜롱 르동, '영원을 향해 움직이는 풍선 같은 눈' |
1870년, 르동은 다시 파리 땅을 밟았다.
평범치 않은 그림을 그린 르동은 긴 무명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르동의 그 시절 대표작은 1878년에 그린 '물의 수호신'이었다. 르동은 물의 수호신을 웬 그늘 진 괴상한 머리통으로 그렸다. 수호신은 큰 눈을 끔벅이며 배와 갈매기, 바다를 지켜보고 있다. 이 괴이한 존재는 잘생기고 예쁘기만 그려졌던 수호신 이상의 존재감을 내보인다. 겉멋이 들지 않은 이 신은 외려 더 든든해 보이기도 한다. 르동은 외로웠던 어릴 적부터 이어가던 공상, 이를테면 눈코입 다 제멋대로인 괴물의 모습도 열심히 그렸다. 그런 다음 앨런 포 등에게 얻은 영감 한 스푼만 더하면 완성이었다. 그는 이 시기에 '영원을 향해 움직이는 풍선 같은 눈'도 그렸다. 눈알로 된 열기구가 위를 보며 올라가고 있다. 이 기묘한 비행체는 사람의 잘린 머리가 담긴 접시를 매달고 있다. 털을 바짝 세운 눈알은 빨리 이곳을 뜨고 싶다는 듯 필사적으로 날아가는 모습이다.
오딜롱 르동, '웃는 거미' |
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
비슷한 시기 '웃는 거미'와 '우는 거미'를 만들었다. 인간 얼굴을 한 각각의 거미가 기분 나쁘게 웃고, 불쌍하게 울고 있다. 검은 형체의 두 거미는 각자의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표정과 상관없이 외롭고 쓸쓸해보인다. "검은색은 가장 본질적인 색이야. (…) 눈을 즐겁게 하지도, 관능성을 일깨우지도 않지만 (…) 그 어떤 색깔보다 깊이 있는 색이라고 생각해." 그쯤 밝은 빛을 캔버스에 담는 인상주의가 유행이었는데, 왜 동참하지 않느냐는 말에 르동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음습한 이야기를 쓴 앨런 포에도 마니아가 있었듯, 음습한 그림을 그린 르동에게도 마니아가 따라붙었다.
그 덕에 르동은 뜻밖의 계기로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1884년, 르동의 친구이자 팬이었던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Joris Karl Huysmans·1848~1907)는 소설 '거꾸로'를 내놓았다. 몰락해가는 귀족 가문의 마지막 후손이 인공낙원을 세우려는 내용이었다. 남다른 예술 감각을 가진 그가 열심히 모으는 게 다름 아닌 르동의 흑백 드로잉이었다. 이 책은 발간 당시부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럴수록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커졌다. "르동이 누구야?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
오딜롱 르동, '폴 고갱의 초상화' |
르동은 1890년대 들어 화풍을 확 바꿨다.
검은색이 지배하던 그의 그림에 색채가 내려앉았다. 다채로운 물감들이 화폭 안에서 영역을 넓혀갔다. 작품의 분위기 또한 우울과 기괴함에서 서정적으로 바뀌었다. 1886년 인상파 전시에서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의 개성 있는 색감을 접한 일, 49살의 나이인 1889년에 드디어 건강한 아들을 얻은 일(첫 아이는 반 년만에 사망했다) 등이 원인으로 꼽힌다. 확실한 건, 위스망스 덕에 이름도 알렸으니 팔리는 그림이나 그리자는 식의 단순한 이유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쯤 르동은 '폴 고갱의 초상'을 그렸다. 자신에게 색의 황홀함을 알려준 여덟 살 어린 사내에 대한 존경 표시였다. 르동은 고갱의 머릿속을 그렸다. 붉은색과 노란색 꽃, 파란색과 녹색 잎, 노란색과 금색이 돼 떠다니는 공기…. 그의 내면이 이토록 아름다운 색채로 넘실댄다는 걸 표현한 것이었다.
오딜롱 르동, '감은 눈(Closed Eyes)', 1890, 캔버스에 유채, 44x36cm, 오르세 미술관 |
르동은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그간의 제 모습은 잊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꿈과 상상을 그렸다. 화풍은 변했지만 주제는 그대로였다. 르동의 1890년 작 '감은 눈'은 흑백의 왕국에서 색채의 세계로 떠나되, 환상과 비현실을 계속 그릴 것이라는 일종의 선언처럼 보인다. 누아르의 틀에서 벗어난 인간이 꿈을 꾸듯 눈을 감고 있다. 이것 말곤 확실한 게 없다. 그는 남자와 여자의 중간쯤 외모를 갖는다. 뒷배경의 푸른색은 실제 하늘인지, 그의 꿈속 상상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가 서 있는지, 누워있는지, 물에 잠겨있는지 등도 정확하지 않다. 이렇듯 르동은 변함없이 모호한 세계를 탐험하고, 유영했다.
오딜롱 르동, '아폴론의 전차' |
뒤늦게 색의 즐거움을 알게 된 르동은 실험을 이어갔다.
검은색 둑이 무너지자 오색 빛깔의 물감이 쏟아져내리는 듯했다. 이 시기에 르동이 즐겨 그린 소재는 '아폴론의 전차'였다. 해의 신 아폴론과 흰 말들, 이들이 모는 태양 마차를 표현했다.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리면서 찬란한 빛깔의 색채를 실컷 써봤다. 아폴론에게 활을 맞고 죽는 괴물 뱀 피톤을 함께 그리는 등 특유의 음산함도 빼놓지 않았다.
오딜롱 르동, '켄타우로스' |
스산한 공기, 차가운 나무 바닥, 깔끄러운 커튼, 눈을 감고 중얼대던 노래….
꿈이었다. 눈을 뜬 르동이 몸을 일으켰다.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기가 맺힌 얼굴을 닦았다. 잠든 르동이 다녀온 곳은 어릴 적 그가 있던 페이를르바드의 집 작은 방이었다. 부모에게 내쳐진 후 눈물나게 외로웠던, 사무치게 쓸쓸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 탄탄히 쌓아 올린 명성이 있었다. 그래서 오래전 그 순간은 다 잊은 줄 알았다. 행여나 떠올라도 웃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그러지 못한 것이었다. 옛 기억은 언제든 그를 기습할 수 있는 것이었다. 꿈과 어린 시절의 잔상에서 허우적대던 르동은 결심한 듯 붓을 쥐었다. 지금 그리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소재가 떠올랐다.
오딜롱 르동, '키클롭스(일부)', 1914, 패널에 유채 등, 65.8x52.7cm, 크뢸러 뮐러 미술관 |
어릴 때부터 신화와 전설, 괴담을 탐닉하던 르동에게 깊은 여운을 준 이야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폴리페모스와 갈라테이아 사이 비극이었다. 르동은 못난 폴리페모스에게 마음이 쏠렸다. 르동이 뇌전증을 바라지 않았듯, 폴리페모스 또한 그 꼴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터였다. 르동이 침울한 아이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듯, 폴리페모스 또한 난폭한 괴물이 되기로 마음먹지는 않았을 터였다. 둘 다 진작부터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면, 어쩌면 아기일 때부터 밝고 정 많은 성격으로 클 수도 있었다. 부모가 자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해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세상에서 추억을 쌓아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신들은 저를 부드러움으로 정말 쉽게 품을 수 있었어요. 저는 눈물 많은 몽상가였으니까요. 그랬다면, 저는 처음부터 화사하고 다채로운 예술을 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검은 그림에 천착하는 그를 실망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에게 차마 못 한 말이었다.
꼬마 시절 르동은 커튼 안 어둠에서 부모의 형상을 떠올리곤 했다. 그다음 그가 할 수 있는 건 만날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들을 흘깃 훔쳐보는 일뿐이었다. 르동의 그림 '키클롭스' 속 폴리페모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갈라테이아는 한때 르동을 외면했던 부모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르동은 선을 긋고 칠하면서 수차례 생각에 잠겼다. 때로는 그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했다. 사실 르동의 작품 상당수에는 옛 상처가 묻어있었다. 그의 물의 수호신 그림은 보호하고 지켜주는 부모의 역할을 생각하게 했다. 눈알로 된 열기구 그림에서는 버려짐과 외로움에서의 탈출 의지를 볼 수 있었다. 울고 웃는 거미 그림을 통해서는 그간 내재한 고립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딜롱 르동, '흰 꽃병과 꽃(White Vase with Flowers)', 1916, 파스텔화, 오르세 미술관 |
오딜롱 르동, 'Two Young Girls among Flowers' |
르동은 붓을 탁 내려놨다.
완성이었다. 그는 무의식 속에 방치했던 케케묵은 감정, 이를테면 사랑받고 싶던 욕망과 버려졌었다는 절망 등을 화폭에 잔뜩 쏟아부었다. 르동은 그제야 검은 기억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 그리고보니 1914년, 어느덧 생의 끝자락이었다. 몸과 마음 모두 한결 가벼워진 말년의 르동은 꽃 그리기에 더 힘을 쏟았다. 그렇게 해 만든 그림에는 찬란한 꽃의 모습, 검은 꺼풀을 훌훌 털어버린 자기 내면의 오색찬란함이 함께 담겨 있었다. 르동의 여생은 고요했다. 그는 키클롭스를 완성한 후 2년 뒤 '흰 꽃병과 꽃'을 그렸다. 그의 충만하다 못해 터질 듯한 내면의 풍요로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가 아니면 꽃을 보거나 풀을 다듬었다. 르동은 이 그림을 그린 1916년, 일흔여섯 나이로 사망했다. 르동의 명성은 죽어서도 이어졌다. 훗날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꿈과 내면을 담은 르동의 그림을 교본으로 삼기도 했다.
오딜롱 르동, '오딜롱 르동 부인(카미유 팔트)' |
머리에 꽃핀을 꽂은 한 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앉아있다. 앙다문 입은 곧 미소로 바뀔 듯하다. 르동이 그린 열세 살 연하 아내, 카미유 팔트(Camille Falte·1853~1923)의 모습이다. 르동의 사랑 이야기는 따뜻하다. 그는 1880년, 마흔 살이 돼서야 팔트와 늦깎이 결혼을 했다. "결혼식 날 내 입에서 나온 '네'라는 말에 (…) 불순한 생각은 일절 없다. 이것은 (…) 절대적인 확신이다." 르동은 이런 글을 쓸 만큼 팔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팔트도 마찬가지였다. 지적이고 총명했던 팔트는 르동의 아내이자 친구, 나아가 뮤즈 역할까지 수행했다. 팔트는 배려심도 깊었다. 르동이 꽃 그림에 푹 빠졌을 때는 그를 위해 야생화를 채집했다. 꽃도 없고, 돈도 없을 때는 자기 물건을 팔아 꽃을 사놓았다. 첫아들을 허무하게 잃고 절망하는 그를 일으킨 사람 또한 팔트였다. 그녀가 없었다면 르동의 그림이 이렇게까지 밝아지기는 힘들었을 것이었다. 팔트는 르동이 죽고 7년 후인 1923년, 일흔 살 나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참고자료〉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줄리언 책방, 다산북스
Odilon Redon, Gustave Moreau, Rodolphe Bresdin, Museum of Modern Art, Literary Licensing, LLC
속-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문예출판사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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