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VB사태 교훈, ‘머니무브’ 대비 현금 비축
美긴축의 역사 모두 글로벌위기로 이어져
非달러 통화국 스태그플레이션 가능성 커
韓경제구조 환율불안·고금리에 유독 취약
한계기업·부동산PF·해외부동산 부실 복병
지난 8월 23일 본 연재에서 ‘미국 10년 국채금리 5% 넘을 수도’라는 전망을 제시했다. 현실이 됐다. 지난 4일 전세계 채권시장이 ‘대폭락’했다. 채권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 이제 미국의 10년만기 국채 금리 5% 돌파는 시간문제가 됐다. 과거에도 미국이 고금리를 주도하면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이대로면 경제위기는 피하기 어렵다. 고금리·고물가에 빚 부담이 커지고 자산가격은 급락하면서 기업들이 문을 닫고 가계는 실질소득이 줄어드는 스태그플래이션(Stagflation) 확률이 아주 높다. 특히 우리 경제는 미국발 고금리에 유독 취약한 약한 고리들이 수두룩하다.
▶고금리 경제, 주식 보다 채권으로 이해하라
경제위기라고 하면 보통 증시 대폭락을 떠올린다. 가치가 무너지는 게 위기라면 사실 주식보다 채권이 더 중요하다. 금융시스템과 실물경제를 이어주는 플랫폼이 금리시장이고 채권의 형태로 존재한다. 시장 규모도 증시보다 훨씬 크고 경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다. 거시경제(Macro)를 이해하려면 주식보다 채권을 먼저 봐야 한다.
지난 4일의 사상 최초로 10년 국채 선물 가격이 하한가로 거래를 마쳤다. 증시로 치면 삼성전자가 하한가를 기록한 셈이다. 이날 금융시장을 뒤흔든 진앙은 채권인 대부분의 미디어들은 고작(?) 2.4%(코스피 기준) 하락한 주식시장을 헤드라인으로 뽑았다. 채권가격이 왜 대폭락했고 어떤 고리로 원화가치와 주가까지 곤두박질 했는지에 대한 설명도 부족했다.
주식이 하한가를 맞는 이유는 십중팔구 투매다. 값이 더 떨어질 것을 걱정해 한 푼이라도 더 건지려고 보유한 물량을 현금화하려는 시도다. 채권 대폭락의 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채권금리는 가격과 반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긴축을 강화하고 연방정부가 재정지출을 위해 국채를 더 발행할 전망이 짙어지면서다. 금리가 오를 가능성은 곧 손실 위험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채권은 만기가 길수록 가격 변화에 민감하다. 장기채권 금리가 급등하자 투자자들이 앞다퉈 보유 물량을 처분한 이유다.
▶채권가격 급락, 금융시스템에는 치명적
채권은 주로 금융회사들이 가지고 있다. 은행, 보험사, 증권사, 연기금 등이다. 보유채권 가격이 하락하면 장부상 평가손실을 반영(매도가능증권 분류 시)해야 한다. 손실이 커져 재무건전성이 악화되면 고객자금 이탈이 나타날 수 있다. 고객이 자금 인출을 요구하면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보유자산을 다급히 팔아야 하고 그에따라 자산가격이 다시 하락하는 악순환이 나타난다.
올 초 발생한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사태가 대표적 사례다. 금리가 올라 SVB가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던 장기 미국채 가격이 하락하면서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Bank run)로 이어진 사건이다. 장기채권 금리가 급등하자 금융회사들이 손실을 줄이고 현금(Liquidity) 부족에는 대비하기 위해 앞다퉈 보유 채권을 내다 판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면 금융회사들은 왜 현금부족을 걱정할까?
최근 주요국 금융시장을 보면 은행보다 안전한 정부 발행 채권의 이자율이 더 높다. 특히 만기 전 인출이 제한되는 예금과 달리 단기채권은 만기가 짧고 매매도 쉽다. 은행이나 보험사에 맡긴 돈을 빼서 고금리 단기국채에 넣어두는 것은 분명 영리한 선택이다. 금융회사는 고객들의 자금 인출 수요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금리가 오르면 금융회사들의 대출 부실 위험도 커지는 데 이를 감당하려면 미리 현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 미국 주도 고금리, 모두 경제위기로 이어졌다.
채권은 만기가 있다. 돈을 갚을 때가 다 되어서야 부실 여부가 확인된다.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려도 실물경제에 영향을 미치려면 충분한 강도와 시간이 필요한 이유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미국 연방정부의 확장적 재정지출 기조는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연준이 기준금리를 ‘더 높게 더 오래’(higher for longer) 가져갈 확률이 아주 높다. 과거 이같은 기조는 모두 위기로 이어졌다.
1994년 초 연준은 3%이던 기준금리를 1995년 6%까지 올린다. 미국 기준금리는 1998년까지 5% 이상으로 유지된다. 오랜 달러 강세는 신흥국들의 외화 곳간을 고갈시켰다. 러시아 채무불이행으로 촉발된 롱텀캐피탈매니지먼트(LTCM) 사태, 태국 바트화 폭락 사태, 대한민국 외환위기 등이 잇따라 발발한다. 강달러로 글로벌 자금이 미국에 몰리면서 증시 거품이 커졌고 결국 2000년에는 미국도 인터넷 주식의 가격 거품이 꺼지면서 엄청난 기회비용을 치러야 했다.
인터넷 거품 붕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저금리 정책을 펼쳤고 이는 자산가격을 자극해 물가를 끌어올리게 된다. 연준은 2004년 5월 1%이던 기준금리를 2006년 7월까지 5.25%로 끌어올린다. 강 달러에 미국으로 돈이 몰리며 증시는 물론 집값도 가파르게 상승한다. 하지만 고금리가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부실을 드러내면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이자부담 커지는 미국…‘아킬레스건’은 재정
최근 미국 경제지표를 보면 여전히 뜨겁다. 물가 상승폭이 상당하지만 고용이 활발해 임금이 더 오르며 소비가 계속 늘고 있다. 주택관련 가계대출에서 고정금리 비중이 높아 금리상승에도 이자부담은 크게 늘지 않았다. 이처럼 경제가 좋은 데 과연 위기가 올까? 과거에도 위기 직전 미국 경제는 늘 좋아보였다.
미국 기업들은 3~5년짜리 만기의 회사채로 주로 자금을 조달한다. 코로나19 이후 초저금리 때 대규모로 조달한 자금의 만기가 올해부터 2025년까지 차례로 돌아온다. 돈을 갚든 지 몇 배나 더 많은 이자를 내야 한다. 가계도 마찬가지다. 신규 주택담보 대출 금리는 연 8%를 넘어 연일 고공행진이다. 신용카드 대출이나 자동차 할부 이자율은 시장금리를 반영해 이미 크게 높아졌다. 임금 상승세는 언젠가 꺾일 수 밖에 없지만 고금리는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자 부담이 커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미국 경제의 최대 채무자인 정부의 빚 부담도 변수다. 고금리는 국채 이자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세수가 늘면 국채 발행을 줄이거나 덜해도 되지만 바이든 행정부의 신재생에너지 전환정책은 막대한 재정지출을 필요로 한다. 특히 상당 부분이 세금을 깎아주는 조세지출이다. 세수 부족은 불가피하고 이에 따라 국채발행을 더 늘려야 하는 구조다. 이자비용까지 상승하면 재정적자 확대는 불가피하다.
아무리 기축통화국이지만 무한대로 달러를 찍어낼 수는 없다. 재정적자가 계속 늘면 결국 긴축 또는 증세 중 하나를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재정지출을 기반으로 유지되는 현재의 호황과는 상극이다.
▶‘인플레’ 수출하는 미국…글로벌 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앞서 단기국채에 자금이 몰리는 상황을 설명했다. 전세계 단기국채 중에 가장 안정적으로 높은 이자를 주는 곳은 어디일까? 단연 미국이다. 최근에는 뉴욕증시 보다 미국 단기국채 시장이 전세계 달러를 더 강력하게 빨아들이고 있다. 이는 비 달러 통화의 환율에서 확인된다. 미국의 고금리로 달러가 강해지면 상대적으로 다른 통화들의 가치는 하락하게 된다.
유로화는 다시 달러와 1대1(parity)에 가까워지고 있고, 엔화는 달러당 150엔을 넘어 155엔까지 추락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달러당 위안화 가치와 원화가치도 이미 연중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통화가치가 하락하면 수입물가가 높아져 중앙은행의 기준금리 인상부담이 커진다. 금리가 오르면 투자가 어려워지고 이자 부담에 소비도 위축된다. 유럽과 중국의 경기침체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글로벌 소비를 주도하는 유럽과 중국 경제의 위축은 이들에 자원과 제품을 수출해 먹고 사는 신흥국 경제에 치명적일 수 있다. 수출로 달러를 벌지 못하면 필요한 자원과 식량, 제품을 구할 수 없다. 미국의 고금리가 신흥국 외환위기로 이어지는 구조다. 반대로 미국은 강 달러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싼 값에 주요 제품을 수입하게 된다. 물가를 잡기 위한 미국의 긴축을 ‘인플레이션 수출’로 보는 이유다.
경기가 침체되면 원유 등 원자재 수요가 줄어 가격이 하락하는 게 보통이다. 원자재 가격이라도 안정되면 물가 부담은 줄어들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 산유국을 비롯해 자원 수출국들은 생산량 조절로 가격하락을 막고 있다. 미·중 경쟁과 함께 자원 무기화와 자국 이기주의가 확산된 결과다.
▶빚더미 한국경제…이자는 눈덩이, 소득은 뒷걸음
우리나라는 경제에서 무역 비중이 높다. 글로벌 경기에 따른 수출실적 변동성이 크고, 환율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특히 외환시장이 아주 취약하다. 유로 처럼 주요 국제결제통화도 아니고, 일본처럼 미국과 무제한 통화스와프 협정을 맺고 있지도 않다. 그렇다고 중국처럼 정부가 환율을 통제하지도 못한다. 외환시장은 개방됐지만 역내시장만 존재해 작은 자극이나 충격에도 쉽게 요동친다. 금융시장에서 외국인 투자비중이 높아 언제든 외환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구조다.
환율 불안은 금리상승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 가계와 기업들의 빚은 주요국 가운데 가장 많다. 특히 변동금리 비중이 높아 금리 변화가 즉각 이자율에 반영된다. 2021년 예금은행의 대출잔액은 2050조원, 평균이자율(잔액기준)은 3.04%였다. 이자부담액을 계산하면 약 62조원이다. 지난해에는 예금잔액은 2166조원으로 5.6% 늘었지만 이자율이 4.92%로 치솟았다. 이자부담액을 따지면 106조5600억원으로 1년새 71% 급증했다.
정부가 특례보금자리론을 확대하고 50년 주택담보대출을 도입하면서 올해 7월말 예금은행 대출잔액은 2200조원을 넘어 전년 말 대비 7.76%나 증가했다. 특금론과 50년 주담대를 다시 규제해 대출 증가세가 주춤해진다고 해도 5.1%대인 현재 금리면 올해 이자액은 114조원 이상으로 커질 수 있다. 은행대출의 60% 규모인 비은행 대출까지 감안하면 200조원에 육박할 수도 있다.
이자부담이 늘어도 소득이 높아지면 괜찮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고용노동부의 8월 사업체 노동력 조사 결과 올 7월까지 물가수준을 반영한 근로자 1인당 월평균 실질임금은 355만9000원으로 전년동기대비1.5% 줄었다. 그렇다고 물가 상승세가 단기간에 진정될 것 같지도 않다. 9월 소비자물가는 1년 전보다 3.7% 올라 5개월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물가는 감산에 따른 고유가가 반영되는 10월 이후 더 오를 가능성이 크다.
▶한계기업·부동산PF 부실 연명정책에 감춰져…해외부동산 투자 ‘복병’
경제 곳곳에 도사린 위험요인들도 꽤 치명적이다. 15년 이상 한계기업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서 고금리에 경영난을 겪을 수 있는 한계기업들이 수두룩하다. 정치권의 표퓰리즘에 경기에 민감한 자영업자들에게 어머어마한 대출이 이뤄졌는데 부실 가능성이 우려된다. 이같은 기업·자영업자 대출은 정부 기관의 보증을 바탕으로 한 것이 많다. 부실이 터지면 정부에 엄청난 부담이 될 수 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위험도 상당하다. 최근 정부가 대책을 내놨지만 ‘연명’ 수준에 그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다. 굳이 늘리지 않아도 이미 남아도는 보증한도를 더 높인다고 팔리지 않을 부동산이 팔리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리가 치솟으며 위험 관리가 다급해진 금융회사들이 부동산PF에 대출을 적극적으로 늘릴 가능성도 거의 없다.
부동산PF에 이어 불거진 해외부동산 투자 부실도 복병이다. 대부분이 가치가 하락해 거래가 실종된 상업용 부동산인데다 투자순위도 높지 않아 막대한 손실이 예상된다. 시가평가가 어려운 부동산 자산의 특성상 부실의 규모도 드러나지 전에는 가늠이 쉽지 않다. 금리가 치솟는 상황에서 투자 부실로 금융회사 재무건전성까지 악화되면 자금시장 경색으로 이어져 실물경제에까지 충격을 주게 된다.
kyhong@heraldcorp.com